2024.05.15 (수)

  • 구름조금속초17.6℃
  • 맑음9.3℃
  • 맑음철원9.7℃
  • 맑음동두천10.6℃
  • 맑음파주9.5℃
  • 맑음대관령6.9℃
  • 맑음춘천9.1℃
  • 구름많음백령도12.7℃
  • 맑음북강릉17.9℃
  • 맑음강릉19.5℃
  • 맑음동해17.8℃
  • 맑음서울13.8℃
  • 맑음인천14.1℃
  • 맑음원주11.8℃
  • 맑음울릉도16.8℃
  • 맑음수원12.1℃
  • 맑음영월8.8℃
  • 맑음충주9.4℃
  • 맑음서산10.4℃
  • 맑음울진13.5℃
  • 맑음청주13.3℃
  • 맑음대전9.7℃
  • 맑음추풍령8.3℃
  • 맑음안동10.1℃
  • 맑음상주13.2℃
  • 맑음포항16.2℃
  • 맑음군산9.3℃
  • 맑음대구13.9℃
  • 맑음전주11.2℃
  • 맑음울산13.3℃
  • 맑음창원14.1℃
  • 맑음광주11.6℃
  • 맑음부산15.7℃
  • 맑음통영13.8℃
  • 맑음목포12.5℃
  • 맑음여수15.2℃
  • 맑음흑산도13.8℃
  • 맑음완도11.8℃
  • 맑음고창8.3℃
  • 맑음순천6.6℃
  • 맑음홍성(예)10.1℃
  • 맑음8.9℃
  • 맑음제주14.3℃
  • 맑음고산15.8℃
  • 맑음성산13.0℃
  • 맑음서귀포14.5℃
  • 맑음진주13.1℃
  • 맑음강화11.4℃
  • 맑음양평10.5℃
  • 맑음이천10.2℃
  • 맑음인제8.8℃
  • 맑음홍천9.1℃
  • 맑음태백9.0℃
  • 맑음정선군7.0℃
  • 맑음제천8.1℃
  • 맑음보은8.4℃
  • 맑음천안8.0℃
  • 맑음보령10.6℃
  • 맑음부여7.8℃
  • 맑음금산7.2℃
  • 맑음8.8℃
  • 맑음부안10.5℃
  • 맑음임실6.6℃
  • 맑음정읍8.8℃
  • 맑음남원9.4℃
  • 맑음장수6.8℃
  • 맑음고창군8.3℃
  • 맑음영광군8.6℃
  • 맑음김해시13.8℃
  • 맑음순창군8.1℃
  • 맑음북창원14.8℃
  • 맑음양산시13.2℃
  • 맑음보성군10.5℃
  • 맑음강진군8.3℃
  • 맑음장흥7.1℃
  • 맑음해남8.3℃
  • 맑음고흥8.3℃
  • 맑음의령군11.0℃
  • 맑음함양군8.4℃
  • 맑음광양시12.8℃
  • 맑음진도군7.9℃
  • 맑음봉화7.6℃
  • 맑음영주10.1℃
  • 맑음문경10.8℃
  • 맑음청송군7.0℃
  • 맑음영덕17.0℃
  • 맑음의성8.2℃
  • 맑음구미11.7℃
  • 맑음영천10.0℃
  • 맑음경주시11.2℃
  • 맑음거창8.6℃
  • 맑음합천12.1℃
  • 맑음밀양12.7℃
  • 맑음산청10.1℃
  • 맑음거제12.8℃
  • 맑음남해13.8℃
  • 맑음12.0℃
기상청 제공
추억의 발자취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뉴스

추억의 발자취

철거 당시 허물어진 담을 통해 본 달 동네

 

추억의 수도국 산 박물관 과 달 동네

 

 

송현근린 공원에 있는 수도국산 박물관 과 달동네수도국산은 소나무가 많다는 뜻으로 만수산(萬壽山)또는 송림산(松林山)으로 불렀다.

 

 

수도국산 인근에 솔 고개라는 뜻의 송현동과 소나무 숲이라는 의미를 지닌 송림동등의지명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인천은 원래 우물이 적고 수질이 좋지 않았는데 개항이후 급격하게 증가한 인구로 물 확보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에 대한제국 시기 중앙관청인 탁지부에서 1906년에 수도국을 신설하고 공사에 착수하였다.

 

 

수도국산이란 명칭은 1909년 인천과 노량진을 잇는 상수도 공사를 벌인뒤

산꼭대기에 수돗물을 담아두는 배수지를 설치하면서 생겨나게 되었다.

 

 

수도국산 달동네의 유래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갑진년(1904)에 왜병이 전환국(현재 전동)근처에 주둔했는데 이때 이곳 주민들을 강제로 철거시켜서

송현동 산언덕에 새로운 주거지를 정해 주었다고 한다.

 

 

고일의 인천석금(1955) 송현동 달동네에 대한 기록으로 고일이 인천의 근대화 과정을 기록한 인천석금에서 찾을수 있다.

 

 

일본인에게 상권을 박탈당한 한국인들은 인천 동구 송현동, 송림동과 같은

신설 마을을 찾았고 비탈진 소나무 숲은 가난한 사람들의 보금자리 변모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고향을 잃은 피난민들이 대거 몰려 들었으며 1960~1970년대에는 산업화와 함께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곳에 이주 하였다.

 

 

산꼭대기까지 작은 집들이 생기면서 181,500규모의 수도국산 비탈에 3천여 가구가 모둠 살이를 하였다. 그 결과 수도국산은 인천의 전형적인 달동네가 되었다.

 

 

 

0-640x360.jpg